"많이 내리지도 않은 비에 산사태가 나더니 여기까지 흙이 차올랐어요. 작년이나 재작년만큼 비가 왔다면 아마 큰 피해가 났을 겁니다."
광주 서구 서창동 주민자치위원회 반재규(62) 부위원장은 30일 백마산 자락 굴다리 외벽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허리 높이 흙자국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백마산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마을과 농경지를 잇는 유일한 길이 막히면서 서창동 주민들은 보름 넘게 굴다리 위 왕복 4차선 도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비탈을 따라 걸어 내려가 벼농사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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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8일 토사가 유출된 백마산 일원에는 일주일가량 막바지 장맛비가 뿌려졌다.
가까운 서구 풍암동에서 기상청이 측정한 하루 강수량은 1일 63㎜, 3일 69.5㎜, 5일 43㎜, 7일 21.5㎜ 등 자연이 감당하지 못할 폭우는 아니었다.
이후 가뭄과 폭염이 이어지면서 추가 산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쏟아진 토사는 구청이 동원한 중장비로 지난달 27일부터 꼬박 이틀 동안 제거 작업을 벌일 만큼 적지 않은 양이었다.
그 사이 주민들은 허리가 깎여나간 백마산 능선을 볼 때마다 불안한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토사가 들어찬 굴다리에서 직선거리로 약 600m 떨어진 백마산 기슭은 승마장 건축허가 취소가 난 지난해 9월부터 1년 가까이 지금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
벌거숭이로 드러난 붉은 흙 위로 설치된 한 겹 토사유실 방지망은 곳곳에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있다.
방지망 아래 흙 표면에는 빗물을 섞여 흘러내린 토사가 남긴 굵직한 굴곡들이 굽이쳤던 흔적 그대로 굳었다.
백마산과 왕복 4차로 국도 사이 구릉 가장자리에는 굴다리를 향해 흐르다 만 토사가 가뭄을 만난 계곡처럼 말라붙었다.
반씨는 공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이 여느 평범한 산과 마찬가지로 두 언덕 사이에 골짜기가 형성된 숲과 들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황당한 사실은 승마장 건립이 추진된 부지가 원래는 구청이 소유한 개발제한구역으로 전임 구청장 임기 말에 헐값으로 팔렸다는 점이다.
승마장 건축 계획은 환경영향평가 등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사천리로 허가가 떨어졌다.
이후 인허가 과정에 있었던 불법행위가 밝혀지면서 담당 공무원들이 중징계를 받고 전임 구청장은 재판에 넘겨졌다.
땅주인은 억울했는지 건축허가 취소와 녹지 복원 명령에 불복해 구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나무가 잘려나가고 들판이 파헤쳐진 녹지는 그렇게 1년여의 세월 동안 버려져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공사현장 인근 무덤을 찾은 벌초객 박모(47)씨는 "볕 잘 들고 포근한 기운 흐르던 아름다운 산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